최근에 안나 감독판을 봤다.
감독과 상의 없이 함부로 자르고 편집해서 방영해버렸다는 그 드라마 안나의 원래 버전.
감독판이 더 좋고 나쁘고를 떠나, 쿠팡이 "일을 대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 창작물을 편집한다는 건, 그 창작자와의 충분한 협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맞다. 시청자의 반응을 고려해 특정 부분을 삭제하거나 집어넣는 일은 그 원 창작자에게 물어보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그런 과정 일절 없이 알아서 판단하고 방영해버린다는 건, 감독을 무시하는 행위와 같다. 나는 "무례한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역시 쿠팡......;;; 너무 싫다. 알바도 하러 가기 싫다. 난 새벽배송도 안 받는다. 쿠팡 노동자가 어떻게 대우받는지 대략 아니까. 드라마 때문에 억지로 와우회원 가입했지만 새벽배송은 죽어도 안 시킬 거다. 2~3일 걸려도 좋으니까 제발 노동자들한테 정당한 근무시간을 보장해줬으면. )
드라마 얘기를 하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유미이다.
유미는 가난한 환경과 자신의 인정, 성취욕구 사이에서 평생을 갈팡질팡했다.
부모님의 실망을 견디지 못하고, 대학입시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못해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스노우볼링이 되어 거짓된 인생을 살았다. 이렇게 무너지려고 여기까지 왔나봐... 라는 대사가 정말 인상깊었다.
나는 유미와, 한 끝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미와 같은 경제적 환경에서 자라나, 유미처럼 부모님과 떨어져 하숙을 했다면 어땠을까.
대학입시를 바로 옆에서 안달하며 지켜보는 부모님이 아니라, 전화로 합격발표를 이야기해야 했다면 어땠을까.
부모님과 나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곧 감정적 거리감으로 연결된다. 유미처럼 적절히 부모와 분리된 삶을 살았다면, 어쩌면 나도 거짓말이 스노우볼링으로 번졌을지 모른다. 내가 저렇게 되지 않을거란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나도 유미처럼 상황회피를 위한 한순간의 거짓말을 한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황은 결국 나 자신의 감정적 흔들림과, 그보다 더 중요한 그 흔들림을 발생하게 만든 "주변 환경"이 있었기에 금방 들키곤 했다.
그러나, 유미처럼.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하는, 자식을 철석같이 믿는 순하고 둔한 부모님을 두었다면.
한순간의 거짓말로 인해 입학식에서 사진을 찍었다면.
그때 스쳐지나간, 우연히도 만난 선배와 하숙집에서 다시 만났다면.
그 선배가 신입생을 적극적으로 동아리에 포섭하려는 열정있는 사람이었다면.
자꾸만 낯가리는 신입생을 품어주려는 분위기에 눈 녹듯이 녹아버렸다면.
그래서 내가 정말 원하던 대학에 다니는 신입생인 마냥 그 순간의 감정들에 충실히 취해버렸다면.
거절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공통 특성을 가진 유미와 나는 어쩌면, 환경의 차이로 인해 이렇게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 부모님은 본인의 실망감을 받아들였고, 그보다 내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며, 내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나 또한 유미만큼의 용기는 없었고, 거짓이 들킬까 두려운 감정으로부터 도망쳤으며, 눈 꽉 감고 진실을 털어놓는 경험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물론 남들처럼 사소한 거짓말은 하고 산다. 건강식을 먹길 원하는 엄마한테 오늘 피자를 배달시킨 사실을 숨긴다던지, 구태여 말하지 않는다던지, 말해도 될 상대에게만 털어놓는다던지.
유미는 후반에 진실이 와르르 무너지는 과정에서, 오로지 한 사람, 지원선배(그 하숙집선배)에게만 진실이 담긴 usb를 건네준다.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묻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내게 친절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대단치 않은, 그저 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진짜 내면을 들여다봐줄,
그녀의 실망감을 견뎌내줄 든든한 지지자.
자신의 실패를 말해도 될 상대의 존재.
내가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직업에서 만족감을 얻지 못해도, 사람들은 누구나 괜찮은 척 포장하고 살아간다.
극중에 유미가 조비서에게 건넨 말이 있다.
것봐요, 이 정도 거짓말은 누구나 다 하고 산다니까.
하지만 그 삶을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는 가져보면 알게 된다.
유미가 무너진 이유는 결국 그것이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화려한 성 안의 공주님.
대선후보를 위한 들러리. 예쁘게 웃는 인형같은 역할.
어릴 때 꿈꾸던 유미의 모습을 실현시켰지만, 유미는 그게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기대를 실망시키며 살아간다.
우리는 삶 속에서 기대를 저버려도 괜찮은,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아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안전지대'가 필요한 것이다.
유미에게는 그게 없었고, 나에게는 그게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둘 다 있었다. 바로 부모님과 친구라는 안전지대가.
유미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고, 나는 그것을 자각해가고 있다는 말이 더 맞다.
내 곁의 사람이 내가 그들의 기대를 저버려도 여전히 나를 지지해주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그들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내 삶 속에 함께한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감독판이 좋았던 점
눈 내리는 주차장에서 진짜 안나(현주)가 유미에게 묻는 장면이 추가되었더라.
뭐라고 했는지는 생각이 잘 안나는데 그 비현실적인 장면만 기억이 난다.
하얀 눈이 실내 주차장에 내리고 있었다.
유미의 집 앞, 안나를 마주쳤던 바로 그 주차장에, 안나가 우아한 사슴처럼 앉아 있다.
아, 기억났다.
설국의 풍경 속 유미가 얼어붙어있다. 이미 죽은 안나는 유미가 상상할 수 있는 생전의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앉아있던 안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유미의 주위를 돈다. 하지만 그 모습에는 생기가 없다.
해맑게 안나를 비웃고, 왁자지껄 통화하며 걸어가며 조롱하던 안나는 이제 죽은 망령이 되었다.
어딘가 영혼이 없는 듯한 느낌으로 천천히 안나가 말한다.
안나는 사실 고귀한 러시아 공주 아나스타샤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안나 앤더슨이라는 다른 사람이 아나스타샤를 죽이고 그 이름을 훔쳤다고. 그걸 알고 그 이름을 안 쓰기 시작했다고. 너는 훔친 이름으로 살아봤는데,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눈이 천천히 내린다. 안나의 시간이 얼어붙은 공간 속 유미의 시간만이 천천히 흐른다.
생기없는 안나의 형상이 다소곳이 존재한다. 뺨에 피가 돌고 입김을 내는 것은 오로지 유미뿐이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서 그런가, 사람들은 지옥이 공간이라고 하더라.
사실은 공간이 아니라 상황인데.
어리석고 가엽다고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냐."
내가 이 장면을 소설로 적는다면 이렇게 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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