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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2024 : 스물아홉 살 기록

36. 취업 소감

by 늘보고영 2024. 12. 19.

그렇습니다. 기나긴 취준생활에 막을 내렸습니다.

마침 연말이기도 하니 블로그에 글쓰기 좋은 시점이라 돌아왔어요.
2024년은 정말 바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대격변의 해였습니다.
특히 연말이 저에게도, 모두에게도 정말 정신없이 흘러갔을 것 같네요.
(윤석열 체포하고 메리크리스마스~ 국짐당 해체하고 메리크리스마스~)

개인적으로 올해는 제게 있어 정말 혼란스럽고 좀 암울한 시기였는데,
졸업하고 거의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달려오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면서
내가 과연 디자인에 잘 맞는 인간인가..? 잘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깊어졌거든요...
상업적인 디자인에 대한 회의감이 끊임없이 들었고, 이런 사람이 과연 작금의 소비적인 행태에 맞춰 트렌드를 좇으며 이목을 끌어 소비를 끊임없이 유도하는 분야의 종사자로서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이었던 건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학원 선생님이 그러시더군요. 제가 되게 철학적이고 비장한 사람이라고... 제가 하고자 하는 디자인이, 계속해서 사회의 잘 비춰지지 않는 면을 주목하거나 작은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섬세함을 가진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포장하려 해도 대다수의 주류 디자인 -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이나 깊은 고민없이 만들어낼 수 있는 디자인 - 과는 솔직히 거리가 있었죠. 그리고 이런 성향은 빠른 취업에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야 맙니다......... 저는 소위, "결"이 맞는 곳을 찾아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나는 그런 곳에서야 숨을 쉴 수 있었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느 디자인 회사 대표님의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에서 한 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의 사회참여는 선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선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논리적인 설득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그런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야말로 부단히 지식을 쌓고 영감을 얻는, 그리고 실력적으로도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죠. 아니 선생님, 저는 지금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요? 이제 밤샘을 하루만 해도 다음날 수명이 깎여나갈 듯한 괴로움과 기절할 듯한 열병 속에서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러운 나날 속에서, 하루걸러 하루 밤샘하고 다시 기절하듯이 3시간 잠들었다 일어나면서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야 했습니다. 덕분에 완성된 결과물은 내가 지금까지 낸 것 중에 최고였지만, 번아웃씨가 찾아왔죠. 6개월 가량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성향상 정말 아무것도 안하면 정신병이 오기에 스타듀밸리를 협동플레이로 하면서) 내 인생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길목에서 방황해 버렸습니다. 시기적으로도 아홉수를 맞이하면서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는 위기감에 놓여있었구요..

와중에 갓졸업 시절보다 안목은 높아지고 보이는 세계가 넓어지면서, 정말 탐나고 가고 싶은 기업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기업 비전이나 대표의 마인드를 많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참 살기 불편하게도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는 듯.....;;;;) 불편한 부분이 끝없이 불편하였고, 계속 입사지원서 넣기가 망설여졌습니다. 남들은 30개, 40개씩 돌릴 동안, 저는 딱 세 군데에만 지원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 곳만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두 곳은 너무나 지원서를 공들여 쓰는 바람에 쓰던 중 마감해버렸고; 한 군데는 너무나 가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게 질러버렸더니 불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정성스러운 답신 메일로 인해 저는 또 한 단계 성장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대표님의 마인드에 감탄)

그리고 기적처럼 그때 지원서도 못 내본 회사가, 연말 채용공고를 다시 내더군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트폴리오를 만든 것에 대한 보상일까요. 인연이 될 곳은 결국 인연이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름에 처음 공고를 본 순간부터 강렬하게 끌렸습니다. 대표님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담긴 철학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나를 탄복시켰고, 드디어 내가 숨쉴 수 있는 곳을 발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무너져가는 우리 세상에 대한 성찰과 탄식, 그리고 사람을 치유하는 음반 레이블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끊임없는 숙고와 결단. 이런 곳이라면 사람의 소중함을 너무나 잘 알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상시모집", 또다시 언제 마감할지 모르는 바로 그 희망고문의 네 글자.
그러나 절대로 대충 지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를 믿고 기다릴지도 모를 회사에 대한 배신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배신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밤샘을 그렇게 6개월만에 다시 재개했습니다. 우연찮게도 책자디자인 외주가 겹치면서 더욱 시간이 없었습니다. 최소 2주는 넘게 잡아야 할 작업을 4일만에 완성시켰고, 내가 한 모든 노력은 결국 엄청난 보석으로 돌아왔습니다. '보상' 보다, "보석"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넘어 결국 만났을 때, 너무 아름다운 것을 가까이 하게 되었을 때에 내가 느낀 감정은 몽중몽이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이었어요. 그분은 엄청난 인고와 부단한 노력으로 단단히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어요.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이상으로 그려온 아티스트로서의 그와, 대표로서의 현실적인 그가 달라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팬심을 넘어서 진정한 동료로서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에요. 긴장과 설레임을 내려놓고, 점차 전문가로 성장해나갈 저의 미래가 언뜻 비췄기 때문이에요.
(감각이 민감한 HSP로서, 가끔 인연에 직감 같은 걸 느끼곤 합니다. 아주 강렬한 직감은 대체로, 맞더라구요)

네, 이 글은 한 아티스트를 너무나 사랑한 끝에 성덕이 된 (곧) 신입 디자이너의 글입니다.
거의 뭐 가슴앓이했기 때문에 연애한 기분이에요....
내년부터 엔터테인먼트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기쁘고 신나게, 가벼운 마음으로 올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생한 나 자신에게 눈물이 났는지, 되돌아보면서도 울컥하네요....
 

 
그러나 이제부터가 진짜 삶의 시작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멈춰진 길이 열렸으니, 내 앞에 놓여진 인생을 당당하고 기쁘게 걸어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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