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가까웠던 적이 있다.
나는 대비되는 이미지를 좋아한다.
명과 암
선과 악
흑과 백
무와 유
시각적으로 대비되는 색상 혹은 구도의 적절한 조화는 언제나 시선을 잡아끌게 한다. 디자인의 원리 중 하나일 정도로, 대비는 아주 강력한 시선끌기 도구이다.
그래서 나는 대비를 좋아한다.
그 경계지점에서 분산되어 스펙트럼으로 퍼지는 그레이스케일 지대에 놓인 것들은 나아가 사랑한다.
빛을 열심을 추구하며 삶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세상의 희망을 조금이라도 믿으며 성실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어두움을 그 반대, 우울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때로는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이라 가정하자.
어둠에 속했던 시절 빛의 세계는 내게는 너무 찬란하기만 했다. 그렇게 되려면 엄청난 인고와 노력을 쏟아부어 끊임없이 발을 저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노력을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말은 맞다. 극한상황에 처한 누군가에게는 빛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 끝없는 시시프스의 노력 같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경계부근에 놓인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끝없이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제 막 빛의 존재를 접한 사람,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사람, 빛의 세계로 반쯤 가는 사람, 도중에 수레바퀴가 망가져 고치는 중인 사람, 가다가 자빠진 사람, 같이 일으켜 세우는 사람, 빛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사람.
나는 어디쯤인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빛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스펙트럼의 세계를 접하면 도움이 많이 된다. 아니,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무너져도 오래 무너져있게 되지 않는다. 구불구불 길을 돌아서라도 결국 다시 향하게 된다. 가늘고 얇게 이어지는 게 내 길인가 보다.
그렇다면 빛의 세계에 당도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너무나 밝은 빛을 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큰 뜻을 품은 누군가를 만나는 날이 내게도 올까?
그와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날이 내게 주어질까?
세종이 한글을 반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찌보면 그 이전에 태종이 강력한 왕권을 다져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두움의 세계를 알고 빛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뿌리가 자라난다. 집현전 8학사와 장영실과 충성하는 사람들을 만나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들이 세종의 뿌리가 되었다. 뿌리깊어 조선에서 대한제국, 오늘날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나무가 되었다. 나의 뿌리는 무엇일까. 어떤 것을 만나 나무를 틔우게 될까.
드라마 보다가 뽕차올라서
주절주절 헛소리를 좀 해봤다.
#밥을 안먹어서 이래 #고기내놔